시를 지우는 자리

<뺨에 서쪽을 빛내다>. 장석남.



소박하고 깔끔하다. 간단하고 단단하다. 중언부언하지 않으면서도 먼 길을 돌아온 사람의 기껍고 묵직한 발걸음을, 어떠한 인위도 계량해 맞출 수 없는 정확한 삶의 무게를 한 발 한 발에 싣는다. 범박한 일상이나 자연으로 돌아간 시인의 모습이 독자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키는 모종의 혐의들을 산뜻하게 뛰어넘는다. ‘여전히 말을 할 줄 알아서 섭섭한 이름들을 떠오르는 대로 부르는’ 이 시인은 결국 안다. 다음 시, 다음 발걸음은 결국 ‘시를 지우는’ 자리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음을. 삶을 통해 깨달은 숙명적 귀향(歸鄕)에의 체험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일상의 곳곳으로 발을 뻗게 만든다. 대단한 것을 실어 보이겠다는 마음이 없는 만큼, ‘얼어붙은 연못’ 아래에 갇힌 파문들만큼 웅숭깊고 너른 세계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고사리, 작약, 석류, 부뚜막, 도라지꽃밭, 쌀알, 바위, 동백 속으로 들어가서 ‘한칸 방이 되어’ 들어가 앉는다. 비루해지는 일상적 삶에 대해 날카로운 뉘우침은 있지만 째지는 고통은 없다. 결국, 다시, 시를 지우는 자리가 마련될 것을 알기에. 그 자리가 마련되는 ‘떨림 속에 집이 한 채 앉으면 시라고 해야 할지 꽃이라 해야 할지 아님 당신이라 해야 할지’……

Posted by Counter-Songwriter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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