紙蟲. 채만식.

글창고 2011.12.16 17:32


  문필이
생업이고 보니 종이를 먹어 없애는 것이 일이기야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원고 용지 하나만 하더라도 손복(損福)을 할 만치 낭비가 많다.

  얼마 전 안서(岸曙)를 만나 차를 마시면서 들은 이야긴데…….

  동인(東仁)은 집필을 하려면 오십 매면 오십 매, 백 매면 백 매, 예정한 분량만치 원고 용지에다가 미리 넘버를 매겨 놓고서 쓰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단 한 장도 슬럼프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단 한 장도 슬럼프를 내지 않는,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미리부터 원고 용지에다가 넘버를 매겨 놓고는 새끼줄이나 뽑아내듯 술술 써내려 가고 앉았을 동인의 집필 광경이 그만 밉강스러울 만치 마음에 부러움을 어찌하지 못했다.

  혹시 동인 같은 예야 차라리 특이한 예외의 재주라고 치더라도 춘원(春園)은 처음 이삼 매가량은 슬럼프를 내곤 하지만 그 고패만 넘어서면 이내 끝까지 거침새 없이 붓이 미끄러져 내려간다고 하고, 또 나의 동배(同輩)들도 더러 물어보면 첫머리 시작이 몇 장쯤 그러하고 중간에서도 오다가다 슬럼프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별반 대단치는 않다고 하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변 나를 생각하면 때로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단편 하나의 첫장에(초고 것은 말고라도) 항용 이삼십 매쯤 버리기는 예사요. 최근에는 일백삼십 매짜리 「패배자의 무덤」에서 삼백이십매의 슬럼프를 내본 기록을 가졌다. 단 단면(單面) 일백삼십 매짜린데 양면 삼백이십 매의 원고 용지니 육백사십 매인 푼수다.

좀 거짓말을 보태면 원고료가 원고 용지값보다 적어서 밑지는 장사를 하는 적도 있을 지경이요. 사실 그 정갈한 원고 용지가 보기에 부끄러울 때도 있다.

  아마 ‘소설 쓰는’ 공부도 공부려니와 아직은 ‘원고 쓰는’ 공부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긴한 게 아닌가 싶다. 계제에 누구 슬럼프 많이 내지 않고 원고 잘 쓰는 비결이 있거든 제발 공개해 주면 솜버선이라도 한 켤레 선사하지.



 『박문』 1939. 8

Posted by Counter-Songwriter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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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 중 여럿은 외젠 쉬, 폴 페발 등 요즘 활동하는 산문가들이 최근에 얻은 명성에 대해 분노를 터뜨린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비록 경박할지언정 나름대로 재능이 존재한다. 내 친구들의 분노는 우스꽝스럽거나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같이 화내는 것은 시간 낭비이며, 세상사 중에서 가장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관건은 심혈을 기울여 완벽한 형태를 갖춘 순수문학이 유행을 타는 대중문학보다 우월한가 어떤가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다. 그 답은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나도 명확하다. 하지만 이 답 또한 반쯤만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터인데, 외젠 쉬가 자신의 장르 안에서 보여준 재능을 당신은 스스로 속하기를 원하는 문학 장르 속에서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방법들을 동원하여 그만큼의 흥미진진한 관심을 불러일으켜보라.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와 유사하거나 그보다 나은 역량을 소유해보라. 그와 비슷한 집중력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힘을 두 배세 배네 배까지 증가시켜보라. 부르주아들을 욕할 권리가 당신에겐 없다. 왜냐하면 부르주아들은 당신 편을 틀 테니까. 그 정도까지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갖자! 왜냐하면 능력이 지고의 정의라는 사실만이 언제나 진리이니까......  제아무리 건물이 아름답더라도 그 아름다움을 논하기 이전에 그것의 높이와 폭이 몇 미터인가가 우선이다. 평가가 어려운 분야인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엇보다도 몇 줄을 채워넣는가가 중요하다.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혜택받는 것도 없겠지만, 문학의 건축기사는 일단 어떤 가격에라도 팔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건수 譯
Posted by Counter-Songwriter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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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아 눈 부신

<질마재 신화>. 서정주.



고 아저씨는 신령이었을까요? 씨부렁대면 수염 긴 노인네들 이 털고 벙글싱글 웃었구요, 아닌게아니라 말 못 하는 바보들도 벙끗싱끗 웃었어요. 까막눈귀라 나는 몰랐을까요. 헐겁게 펄럭이는 옷바짓자락에 풍덩풍덩 빠지던 새, 꽃, 바람, 짐생들, 손 대이는 게 다 詩 인 줄 몰랐을까요. 되돌아 봐야 그 마당 보이는 걸까요. 자세히 귀기울이면 분명 말이 말 같기는 한데 꼭 그렇지 만두 않은 것이 울음 같기두, 노래 같기두, 웃음소리 같기두, 아니면 접히고 개킨 이불 속에 나는 소리 같기두 하구, 병신 머저리 으흐엉 흐엉아 대는 소리 같기두 하구. 아모튼 모조리 다 섞어 넣어 불어 제끼는 입피리 소리 같기두 한 게 나는 도무지 모르겠시요. 얼마나 천치같이 살아 봤길래 저런 얼투당투 않은 소리 막 해제낄까요. 얼마나 천사같이 살아 봤길래 저리 말 같지 않을까요. 싸질러진 사람이면 모두 앉은뱅이 재곤이처럼 살다 가는 이승에서 힘쓰셨소, 욕보셨소. 이제 피 안도는 곳 봄 안오는 곳 피는 흰 꽃에 몇 자 적다가 불려가는 어느 구름 끄트머리에서 편히 쉬소, 아조 쉬소.

Posted by Counter-Songwriter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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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정쩡할 수밖에 없는 어떤 서정

<오늘 아침 단어>. 유희경



가능한 서정에 대한 고민. 그 자리는 이미 누추해진지 오래다. 하지만 젊은 시인들은 아직도 이따금씩 ‘서정’이라는 현판이 걸린 이 폐가에, 소득없이 돌아설 것을 뻔히 알면서도, 찾아와 괜히 문 한 번 열어보고 닫아보고 한다. 이렇게 서정과 시대 사이를 오고 가는 길은 참으로 많은 고개 숙인 문학청년들의 피를 빨아먹었을 것이다. 그 길목은 아름다울지 몰라도, 길 위에서 엎어지는 청년들의 삶은 자해에 가까운 몸부림 때문으로 피칠갑이고, 참혹하고, 때로는 비통하다. 하지만 이런 반복 (슬프게도 이것들은 반복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끝에, 넘어지지 않는 자세를 용케도 배웠는지, 묘한 자세로 서 있는 한 젊은 시인이 보인다. 놀랍다. 이런 식으로도 서정이 가능할까. 그러니까, 어정쩡함을 자신의 시적 위치로 삼는 식으로 말이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하지 않으려는 것인지 불명확하다. 풍경과 심상과 서정이 각기 예리하게 치고 나오지 않고 서로 뒤섞여 함께 어정쩡하다. 하지만 끝끝내 엎어지지 않고 시의 자세를 지켜나간다는 점에서, 저 시인의 서 있음은 대단하고, 또 의미있다. 저 서 있음은 자신이 결국 서정을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감내할 수 있는 자세이다. 이제는 그 위에서 엎어져야만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어떤 길 위에서 서 있는 시인은 자신의 포즈 하나로 그 오래 묵은 길의 폭을 넓히고 있다. 다음 발자국이 길을 벗어날 것인지 아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고 봐야 겠지만.

Posted by Counter-Songwriter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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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허수경



그때 차가워진 심장이......


스무 해 전에 추억과 기억의 문을 걸어 잠그고 고국땅을 떠난 시인은 그때부터 자신에게 모든 ‘자연’은 ‘여관’이라는 사실이 될 것임을 미리 직감하고 있었을까. 물리적으로 고향을 떠난 순간부터 그녀의 과거와 미래의 끄트머리가 원을 그리며 되묶여 버리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을까. 추억과 예감이 가역(可逆)의 풍향을 그리며 어지럽게 뒤섞일 때, 시인은 이역만리에서 ‘폭풍 속에 여관 하나를’ 열어 거기에 앉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세계가 유목의 바람에 시달리면서 ‘비행장을 떠나’갈 때, 시인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서 풍성한 슬픔의 세계를 유영(遊泳)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자정의 이불 속을 날고 있는 검은 새’ 한 마리를 어쩔 수 없이 키우는 것이고, 미래의 광활한 하늘에 나비나 잠자리 따위의 유년시절의 곤충들이 날고 있는 것이고, ‘아직 당신이 오지 않았는데’ 과거의 남자와 성교하지 않는 것이고, 또 과거의 연인에게 ‘우린 너무 어린 죽음’ 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래서 죽음이 불가능하다. 미래와 과거가 뒤집히고 겹쳐져서, 이미 차가워진 심장이 뛰고, 아직도 더 차가워질 냉기의 공백이 남아 있다는 것이, 아연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때 낙타가 들어’온다. ‘목마름이 짠 흰빛의 원천’이지만, '해갈의 기척이 저 짠 흰빛에' 있다는 낙타의 속삭임이 이 자발적 추방의 영원한 굴레를 슬프고도 충만하게 채운다.

Posted by Counter-Songwriter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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