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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술하게 세부사항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나에게 키스하기 직전 당신 입술을 닦으시는 모습, 디젤 엔진이 맥없이 공회전하고 있을 때 런던의 택시에서 나는 드르륵거리는 소리, 오래된 가죽 재킷에 고기 조각의 지방 줄무늬 같은 흰 줄이 가 있는 모양, 갓 내린 눈이 발밑에서 뽀드득거리는 느낌, 아기의 팔이 너무도 통통해서 끈으로 묶어놓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 등을 알아차리는 법을 문학은 가르쳐준다. 
  이 지도과정은 변증법적이다. 문학이 우리를 좀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런 과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문학을 가르쳐보면 젊은 독자들 대부분이 삶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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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에 나오는 인물을 두고 많은 양의 헛소리가 - 작중인물에 대한 믿음이 너무 많은 사람들 편에서건 너무 적은 사람들 편에서건 - 날마다 씌어진다. 믿음이 너무 많은 사람들은 인물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한 꾸러미 무쇠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독자는 그들을 ‘알게’ 되어야 하고, 그들은 ‘정형화된 인물’이 아니어야 하고, 그들은 외면뿐 아니라 ‘내면’도 가져야 하고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착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와 꽤 비슷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말은) 예술가들은 우리가 용인할 수 없는 인물들을 이해하려 노력해보라고 - 또는 예술가들이 확고히, 그리고 분명하게 그들을 심판하기 전까지 - 우리에게 요구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혐오요소’들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이 늙어가는 호색적인 남자들의 눈을 통해 삶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처럼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일상적 경험의 영역 너머로 들어가는 것이 도덕과 공감에 대한 그 나름의 교육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 특정 평자에게 떠오르지 않는 듯하다. 그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자신이 칠십세가 되면 그렇게 가차없지는 않으리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기사가 유난히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마존 닷컴에 올라오는 수천건의 바보같은 ‘독자평’이 ‘혐오스러운 인물’에 대해 늘어놓는 불평을 일별하노라면, 훈계조로 고상을 떠는 것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인물에 관하여 - 단순히 ‘깊고 입체적인’ 인물을 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실재성의 수준은 작가마다 다르며, 인물의 특정한 깊이나 실재성의 수준에 관한 독자의 허기는 작가에 의해 길들여지고 각 작품의 내적 관습에 적응한다. 
  소설이 실패하는 것은 작중인물이 충분히 생생하거나 깊지 않을 때가 아니라, 문제의 소설이 자신의 관습에 어떻게 적응할지 독자에게 가르치는 데 실패했을 때, 작중인물들과 실재성의 수준에 대한 독자의 구체적 허기를 다루는 데 실패했을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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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과 맥베스는 행동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극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부자연스럽게 연극적이거나,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꾸민 듯하다. 그는 관심을 찾아나서며, 절망적으로 불안정하고 가짜 같은가 하면, 때로는 숨고 또 때로는 고백을 늘어놓으며, 이 장면에서는 오만하다가 다음에서는 자기비하적이다. 소설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문학적 형태가 허용했던 것보다 더 잘 자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관객에 의해 그처럼 면밀히 검토됨으로써 자아가 미쳐버렸다고 해도 과한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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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적 관습에 대해)

  1996년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서사의 기능은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기능은 우리에게 여전히 매우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모방적 성격을 띄지는 않는 광경을 구성해내는 것이다...... 서사에서 ‘일어나는 것’은 지시적 (실재의) 관점에서 보면 말뜻 그대로 無다. ‘생겨나는 것’은 오로지 언어, 언어의 모험, 언어의 도래에 대한 끊임없는 찬미뿐이다.”
  하지만 허구의 관습을 공격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공격에서 더 나아가 허구의 관습은 그 어떤 실재적인 것도 전달할 수 없으며 서사가 재현할 수 있는 것은 ‘말뜻 그대로 無’라는 매우 회의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첫째, 모든 허구는 이런저런 측면에서 관습적이기 마련이므로, 특정 종류의 리얼리즘을 관습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꼭 같은 이유에서 초현실주의, SF, 자기반성적 포스트모더니즘, 네 가지 상이한 결말을 지닌 소설 등도 거부해야 할 것이다. 관습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늙음처럼 승리를 거둔다. 일단 어느 정도 노년에 접어들면 노년으로 인해 죽거나 노년과 더불어 죽거나 하는 수밖에 없다......

  관습과 관련해서 밝혀두어야 할 요점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진실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반복됨에 따라 꾸준히 점점 더 관습적으로 되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사랑도 판에 박은 일상으로 변하지만 그 사실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은유는 과도하게 쓰면 죽은 은유가 되지만, 그렇다고 은유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공격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그 구체적 은유에 대한 우리의 생각, 우리의 익숙함, 즉 우리의 감각이 죽어가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매우 자명하기 때문에, 핍진성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집요한 경향, 즉 그 어떤 것을 실감있게 지시하는 것의 원천적 불가능함과 관습을 혼동하는 경향만 아니라면, 굳이 그런 주장을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브리짓 로우의 주장에 따르면, 허구는 독자에게 철학적 의미에서 사물의 진실성을 믿어달로 요구하지 않고 예술적 의미에서 그것들을 상상해달라고 요구하므로, 허구의 지시성이란 문제 - 허구가 세계에 관해 진실된 진술을 하는가? - 는 잘못 제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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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작가, 곧 삶을 자유롭게 섬기는 자는 삶이 마치 소설이 지금껏 포착해낸 그 어떤 것으로도 포괄되지 않는 범주인 것처럼, 마치 삶 그 자체가 항상 관습적인 것으로 화하기 직전의 순간에 있는 것처럼 항상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다.





Posted by Counter-Songwriter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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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남은 삶의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 수밖에. 인생의 어떤 순간에는 남은 삶을 살아갈 세계를 결정해야만 하는 때가 오기 때문에, 그리고 그 세계의 테두리를 알아차리는 순간 곧 포기해야 하는 삶의 여백이 뚜렷해지기 때문에...... 앞으로 생각과 울음은 모두 여기에서 저기로 흘러나갈 것이기 때문에. 어떤 순간부터 삶이 단지 기다림의 자세라는 것을 알게 된 시인은 앉은 자리에서 ‘남은 빛’을 세고 있다. 그것은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당신과 만나지 않’는, 여백의 자리를 지킴으로 해서 삶을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책상에 강물을 올려’ 놓는다. 책상에 앉아 삽처럼 詩를 파내려 가고자 하는 수직의 견고함이, 인생과 시간처럼 수평으로 계속 흐르며 변화하는 강물과 합쳐져 시인이 결정한 세계의 단단함을 증명하는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화한다. 부동을 견지하면서도 여백을 에둘러 아우르려는 조용한 다짐이 그려놓는 세계 속에서 온갖 빗소리와 새벽, 밤과 빛들이 詩의 배를 드러낸다. ‘삭힐 수만 있다면 인생의 식탁을 / 풀처럼 연한 / 그런 불꽃으로 차려야’ 한다는 그는 기다림의 자리에서 그렇게 시를 떠올리고 있다. 그 떠올림만으로 세상의 빈자리들이 뜨거워진다. 마치 밤 시장에 불빛이 들어오듯.

Posted by Counter-Songwriter 우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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