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좁은 길

루돌프 슈타이너

양억관 譯

 

 

  어떤 사람도 본서에서 언급된 영학적 인식내용을 스스로 얻을 수 있다. 이 저서 속에 시도된 논술 방식은 고차원 세계의 사상 상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견령 능력을 얻는 첫걸음은 이러한 사상 상을 파악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며, 사고에서 출발할 때만 자신이 걸어가는 인식의 좁은 길을 스스로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고차적 세계의 사상 상에 접한 그의 오성에게 그것이 비록 영적 사실에 대한 단순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고, 확인될 수 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것은 무익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성에 부여된 사고 내용은 그의 사상세계 속에 작용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이 힘은 그의 내면에 작용하여 잠들어 있는 소질을 눈뜨게 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상 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자체를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사고 내용 속에서 실체가 없는 추상적인 것 밖에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사상의 근저에는 살아있는 힘이 존재하고 있다. 영시된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사고내용이 전하는 것은 그 내용을 전해 듣는 사람의 인식력을 꽃 피우는 싹이 될 것이다. 고차적 인식을 위한 사고작업을 경멸하고, 사고 이외의 힘에 의지하는 사람은 사고야말로 감각 세계의 능력 가운데서 최고의 힘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떻게 하면 영학의 고차적 인식 내용을 획득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우선 다른 사람의 인식에서 배우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이 본 것을 알고 싶지 않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지식을 배우는 것이 인식의 첫 걸음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믿고 안 믿고가 문제가 아니다. 편견 없는 태도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 진정한 영학자는 결코 맹목적인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늘, 나는 영적 존재 영역에서 이러저러한 것을 체험했다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체험한 내용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체험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이야기한 내용을 그 사람의 사고내용 속에 침투시킨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영적 발전을 위한 살아 움직이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혼계와 영계에 대한 일체의 지식이 우리의 혼에 내재해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지식을 “인식의 좁은 길”을 통해서 알아 낼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혼의 깊이에서 이끌어 낸 것뿐만이 아니라, 타인이 그 혼의 깊이에서 이끌어 낸 것 또한 볼 수 있다. 인식의 좁은 길을 걸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해도, 이런 관찰은 가능하다. 올바른 영적 관찰은 편견에 의해 흐려지지 않는 마음 속에 이해하는 힘을 눈뜨게 해줄 것이다. 내면의 무의식적 지식이 타인이 발견한 영적 사실에 반응한다. 그리고 이 반응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건전한 상식의 정상적인 작용이다. 스스로 영계를 인식하는 데는 수상쩍은 신비적 “침잠”보다는 건전한 상식이 훨씬 더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때로 우리는 건전한 상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영적 연구 성과보다도 신비적 “침잠”으로 얻은 성과를 보다 뛰어난 것이라 믿는 경향이 있다.

  고차적 인식 능력을 획득하려 할 때, 신중하게 사고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늘날 “견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중하고 금욕적인 사고작업을 경시하고 있기에 이런 점을 더욱 더 강조해 두고 싶다. “사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감각”, “감정”이라고.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겠다. 어떤 사람도 사고생활에 정진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견자”가 될 수 없다고, 어떤 종류의 내적 나태가 부당하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덕성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들이 이런 안일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추상적 사고”, “쓸데없는 사변” 등의 경멸적인 언어를 몸에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를 무의미하고 추상적인 사변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사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런 의미의 “추상적 사고”는 초감각적 인식의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고는 초감각적 인식의 토대를 만들어 준다. 물론 사고작업을 하지 않고 고차적 견령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훨씬 편리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견령 능력에 필요한 내적 확실성과 부동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은 오로지 사고뿐이다.

  사고 작용이 없으면, 제멋대로 일어나는 혼란스런 이미지와 혼의 움직임에 농락 당하고 만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도 즐거운 일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과 진정한 의미의 고차적 세계 입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고차적 세계에 입문할 때만 순수한 영계를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 문제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다. “견자”는 그 혼 생활이 절대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진정한 사고 이상으로 이 건강을 관리해주는 것은 없다. 실제로 고차적 영 능력 개발을 위한 수행이 사고를 토대로 하지 않는다면 건강상 중대한 장애를 초래할 것이다. 견령 능력은 건전하고 올바르게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을 생활에서도 건전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사고하는 수고로움을 피하면서 영 능력을 개발하려는 것은 인생에 대한 잘못된 태도나 몽상, 또는 공상에서 유래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고차적 인식을 위해 노력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단 이러한 전제를 두어야 한다. 이 전제는 인간의 혼과 영에만 적용된다. 어떤 육체적인 건강을 해치는 작용은 이 전제 하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근거도 없이 불신하는 것은 해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반발력을 작용시켜 생산적 사고내용을 받아들이려는 행위가 방해받기 때문이다. 맹목적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영학적 사고 세계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오로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는 태도만이 고차적 감각을 열어주는 전제가 된다. 영학 연구자는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의 사고 내용으로 삼아라. 그것만으로도 나의 사고 내용은 그대의 내부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므로, 이제 그대는 그 진실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영학 연구자의 입장이다. 그는 시사를 던진다. 그 시사를 진실이라 인정할 수 있는 힘은 받아들이는 자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영학적 견해는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편견을 버리고 자신의 사고를 이러한 견해에 몰입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스스로 영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런 경지로 그를 착실하게 이끌어 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고차적 현실을 스스로 영시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가져야 할 가장 소중한 미덕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생활이나 세계가 보여주는 것에 대해 편견 없이 귀의하는 태도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 경험에서 얻은 판단의 기준만으로 현실을 상대하는 사람은 그 판단 때문에 현실이 그에게 던지는 은밀한 작용에 문을 닫아버린다. 배우는 자는 어떤 순간에도 이질적인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완전히 텅 빈 그릇이 되어야 한다. 나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판단이나 비판을 모두 잠재우는 순간만이 인식의 순간이다. 어떤 사람과 만났을 때, 그 사람보다 내가 더 현명한가 아닌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예의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위대한 현자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자가 아무리 그의 현명함으로 어린아이를 비판한다 하더라도, 그 비판으로 인하여 그 현명함은 흐려져 어린아이가 그에게 열어 줄 진실을 가려 버린다.(오로지 귀의하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신의 판단을 버리거나 맹목적 신앙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다. 어린아이에 대해 그런 귀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가 보여주는 것에 내적으로 귀의해야 한다. 자신이 이러한 귀의를 어디까지 실천할 수 있는지 시도해 본다면 틀림없이 놀라운 발견을 할 것이다. 인식의 좁은 길을 걸으려 하는 사람은 어떤 순간에도 편견을 지워버릴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버렸을 때만, 다른 것이 그의 내부로 흘러들어 온다. 자신을 무로 하고 대상에 귀의하는 순간, 모든 방향에서 인간을 감싸고 있는 고차적 영적 현실이 흘러 들어온다. 우리는 혼자 힘으로 의식적으로 이런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가령 주위 사람에 대한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는 시도를 해 보자. 좋다거나, 싫다거나, 어리석다거나 현명하다거나 하는 일상적인 판단의 기준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런 척도 없이 인간을 순수하게 그 인간 그 자체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최상의 수행은 혐오감을 억제하고,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이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또는 어떤 판단을 내리고 싶은 상황에 처했을 때, 판단을 보류하고 주어지는 인상에 마음을 내맡겨 본다. (이러한 편견 없는 귀의는 “맹목적 신앙”과는 마우 관계도 없다. 맹목적으로 뭔가를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생생한 인상을 가지며, “맹목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사물이나 사건이 나에게 말을 걸게 해야 한다. 이런 자세를 자신의 사고세계에까지 넓혀야 한다. 자신 속에 어떤 사고내용을 만들어내려는 움직임을 억제하고, 오로지 외부의 사상이 사고내용을 만들어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열의를 가지고 엄숙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이런 태도를 유지할 때 비로소 고차적 인식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이런 수행을 경시할 것이다. 이런 수행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귀의와 편견 없는 태도가 진정한 힘의 원천임을 알고 있다. 증기 솥의 열기가 기관차를 움직이는 힘으로 변하듯이, 몰아적 영적 귀의의 수행은 영계를 인식하는 힘으로 바뀐다.

  이 수행을 통하여 주위의 모든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 능력에 올바른 평가 능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사람은 고차적 인식의 통로를 스스로 닫는 꼴이 되고 만다. 세상의 사물이나 일에 대해, 그것들이 주는 쾌락과 고통의 관점에서만 평가하는 자도 그런 과대평가의 태도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쾌락, 자신의 고뇌로서 그가 체험하는 것은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관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호의는 그와 나의 관계를 느끼게 할 따름이다. 만일 내가 판단하고 태도를 결정할 때, 오로지 쾌감과 공감에만 따른다면, 나는 자신의 성격을 전면으로 드러내는 셈이 된다. 나는 세상에 대해 나의 성격을 강요하고 있다.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세상에 간섭하려 하고 있다. 세상을 편견없이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고, 또한 그 속에 활동하는 다양한 힘을 충분히 살려내려 하고 있지도 한다. 바꾸어 말해, 나는 자신의 성격에 잘 맞는 것에만 관용을 베풀고 있다. 그 외의 모든 거세 대해 나는 반발하려하고 있다. 감각세계 속에 사로잡힌 사람은 특히 모든 비감각적 영향에 반발한다. 배우려는 사람은 사물이나 인간의 어떤 사소한 가치나 의미도 긍정할 수 있는 성격을 길러야 한다. 공감과 반감, 쾌감과 불쾌감은 전혀 새로운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런 감정들을 억제함으로써 자신을 감동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라는 말은 아니다. 정반대이다. 금방 공감, 반감으로 판단을 끌어내지 않는 능력을 기르면 기를수록, 우리는 점점 더 풍성한 감수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자신의 성격을 제어할 수 있을 때, 공감과 반감이 보다 차원 높게 작용하게 됨을 알 것이다. 처음에는 무첫 불쾌하게 느껴지던 일에도 숨겨진 미덕이 있는 법이다. 이기적인 감정에 따르는 태도를 버릴 때, 그런 숨겨진 미덕이 나타난다. 스스로를 이런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다른 사람보다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관으로 감수성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성향은 주위 사물을 밝은 빛 아래 드러낼 수 없다. 자신의 성향에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것은 환경 속에 매몰됨을 뜻하며, 주변 사물과 솔직한 만남을 통해 그 가치를 절실히 느끼려 하지 않음을 뜻한다.

  아무리 좋거나 괴로워도, 어떤 공감과 반감이 생겨도, 자기중심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때, 늘 변하는 외계의 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어떤 사물에서 느끼는 쾌감은 그를 그 사물에 의존하게 한다. 그는 그 사물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인상의 변화에 따라 그때마다 쾌감과 고통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영적 인식의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없다. 평정한 마음으로 쾌감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쾌감과 고통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 대신에 쾌감과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쾌감에 몰두하는 순간, 그 쾌감은 나의 존재를 소모시킨다. 중요한 것은 쾌감을 나에게 부여한 사물을 이해하는 일이며, 쾌감은 그것을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 사물이 나에게 쾌감을 부여하는 것이 소중한 일이 아니다. 내가 쾌감을 체험할 때, 그 쾌감을 통하여 사물의 본질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쾌감이란 그 사물 속에 쾌감을 느끼기에 적합한 어떤 성질이 있음을 표현하는 것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 이 성질을 인식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만일 쾌감에 머물면서 쾌감에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면, 나는 그냥 생활을 즐기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쾌감이 사물의 특성을 체험하기 위한 단순한 기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이 체험을 통하여 나의 내부는 보다 풍성해진다. 쾌감과 불쾌감, 기쁨과 고통은 길을 찾는 자에게 그것을 통하여 그가 사물에 대해 배우는 기회여야 한다. 길을 찾는 자는 그것을 통하여 쾌감과 고통에 대해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쾌감과 고통이 자신에게 사물의 본성을 밝혀주도록 쾌감과 고통에서 자기를 초월시켜야 한다. 이 방향으로 자기를 발전시키면, 쾌감과 고통이 얼마나 우리에게 좋은 선생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모든 존재와 함께 느낄 수 있게 되고, 그 존재의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길을 찾는 자는 “아,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정말 기분 좋다”라는 말을 할 때도, 이 고통, 이 기쁨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늘 생각해야 한다. 그는 외계에서 느끼는 기쁨과 고통을 자신에게 작용시키려 노력한다. 그렇게 할 때 사물과 자신 사이에 전혀 새로운 관계가 생겨날 것이다. 이전의 그는 특정한 인상을 받아들이면서 그 인상이 그를 기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쾌감과 불쾌감을 인식 기관으로 삼는다. 그리고 지금, 이 기관을 통하여 어떤 사물이 그 본성을 말하기 시작한다. 쾌감과 고통은 그의 내적 감정에서 외계를 지각하는 감각기관으로 변화한다. 눈이 무엇인가를 본다. 그리고 손이 행동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 구도자의 쾌감과 불쾌감은 인식수단이 되어 아무 행동도 일으키지 않는다. 오로지 인상을 받아들이는 수단이다. 그리고 이 쾌감과 불쾌감을 통과하여 체험된 일들이 비로소 행동의 원인이 된다. 쾌감과 불쾌감을 이러한 통과기관으로 삼는 수행을 하면, 혼계는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열어 보이는 혼계 본래의 기관을 그 수행자의 혼 속에 형성시켜 줄 것이다. 눈은 감각적 인상의 통과기관이기에 육체적 삶에 유효하다. 쾌감과 불쾌감도 자신의 좁은 세계에 머물지 않고 외계의 혼을 열어 보여주는 인식기관일 때, 혼의 눈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인식의 길을 걷는 자가 자신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걸림돌을 치우고 지금까지 말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주변 사물들과 현상들의 본질이 자신에게 작용을 가해 올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영적 환경 속에 집어넣을 때도 올바른 방식으로 이렇게 행해야 한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기에 이미 영계의 시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영계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인식의 길을 걸으며 진리의 영원한 법칙, 영계의 법칙에 맞는 방향으로 사고해야 한다. 영계는 그렇게 해야만 영적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마음대로 영계에 작용을 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갈구하는 대로 사고하고 그 사고를 통해 얻은 내용만을 믿으려 하는 사람은 진리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고내용은 육체적 존재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내용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뇌에 제약된 정신활동밖에 모르는 사람의 사고세계는 무질서하고 혼란스럽다. 두뇌 속에서 어떤 사고내용이 일어나면 금방 조각나고 흩어져 다른 사고내용으로 바뀌어 버린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또는 자기 자신을 솔직히 관찰해보면, 도깨비불처럼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사고내용에 대해 하나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혼란스런 사고내용을 만들어낸다 해도 감각생활의 과제에 따라 살아가면 현실이 거듭해서 그 잘못을 수정해 준다. 내가 아무리 혼란스러운 사고를 해도, 일상생활은 나에게 현실법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어떤 도시에 대해 내가 가진 관념은 무질서하고 단편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도시에 간 이상 그곳의 현실에 나를 맞춰야 한다. 기술자가 아무리 혼란스런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해도, 일터에서 자신이 다루는 기계의 법칙에 따라 올바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감각세계의 내부에서 현실들이 사고의 오류를 끝없이 정정해 나간다. 만일 내가 어떤 물질적 현상이나 식물 형태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현실이 나를 올바른 사고로 이끌어 줄 것이다.

  그러나 고차적 존재영역과 나와의 관계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고차의 영역은 내가 엄밀하게 규칙을 세운 사고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는 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고가 정확하게 나를 안내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올바른 길을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영계의 법칙이 나 자신의 법칙과 일치할 때, 비로소 나는 영계의 법칙에 따를 수 있다. 고차의 영역에서는 나 자신이 정확한 지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식하는 자는 사고에 엄밀한 규칙을 주어야 한다. 그의 사고내용은 일상적인 삶과 보조를 맞추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는 이런 점에서 자신을 잘 관찰하고 자신을 잘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고내용이 제멋대로 다른 사고내용과 결합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로지 사고 세계의 엄밀한 내용에 적절한 방식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어떤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넘어 갈 때도 엄밀한 사고 법칙에 따라야 한다. 인간은 사상가로서 늘 이러한 사고법칙의 모상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법칙에 유래하지 않는 모든 것은 관념의 흐름에서 배제해야 한다. 예를 들면 아무리 바람직한 사고내용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고의 규칙적 진행을 방해한다면 회피해야 한다. 어떤 개인적 감정이 사고내용에 어떤 다른 방행을 취하도록 강요한다면, 그것 또한 억제해야 한다.

  플라톤은 배우러 오는 학생들에게 먼저 수학을 가르쳤다. 현상계의 일상적인 흐름에 따르지 않는 수학의 엄밀한 법칙은 인식을 지향하는 자에게는 더 없이 좋은 훈련이 된다. 수학을 잘 하려면 개인적인 취향을 모두 버려야 한다. 인식을 갈구하는 자신의 과제에 응하고 싶다면, 제멋대로 일어나는 모든 사고를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고 사고 내용의 요구에 순수하게 따라야 한다. 이렇게 영적 인식에 필요한 사고에 맞춰 가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고생활 그 자체는 수학적 판단이나 추론처럼 엄밀한 법칙에 따라야 한다. 어디를 어떻게 걸어가든, 그런 엄밀한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영계의 합법칙성이 그의 내면으로 흘러들어 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사고가 일상의 혼란스런 성격을 띠게 되면, 이 합법칙성은 소리도 없이 그의 곁을 지나쳐 버릴 것이다. 질서잡힌 사고는 확실한 출발점에서 저 깊은 곳의 진리까지 이끌어 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시사를 일면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수학은 사고 훈련에 무척 유효하지만, 수학을 배우지 않아도 건전하고 살아있는 순수사고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인식을 갈구하는 자는 사고를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행위를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즉, 자신의 개인적인 차원에 속한 걸림돌을 걷어 치우고, 뛰어난 미와 불변의 진리 법칙에 따르도록 노력해야 한다. 미와 진리의 법칙에 따라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옳다고 인식한 것을 실행했다면, 설령 그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충족 시켜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번 내디딘 발걸음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또한 그것이 미와 진리의 법칙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면,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 해도 계속 해서는 안 된다. 일상생활에서는 개인적인 감정에 만족을 주느냐 않느냐, 확실한 성공을 약속하는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행위가 결정된다. 그것으로 우리는 삶의 방식을 이 세상의 진행과 일치시킨다. 그래서 영계의 법칙이 가르쳐 주는 진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행하려 한다. 영계의 법칙을 따를 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 의미에서 활동할 수 있다. 단순한 개인적 성격에서 이루어진 일로는 영적 인식의 기초를 다질 수 없다. 인식을 갈구하는 자는 무엇이 내게 좋은 성과를 주는지,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를 물어야겠지만, 나는 무엇을 선한 것으로 인식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나 개인을 위한 행위의 성과를 묻지 않을 것, 모든 자의성을 버릴 것, 이것이 자신에게 부여할 제1의 계율이다. 이 계율에 따른다면 그는 이미 영계의 길을 걷고 있다. 그 때, 그는 영계의 법칙에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는 감각세계의 모든 강제로부터 자유롭다. 다시 말해, 그의 영 인간이 감각의 껍질을 벗어 던진다. 이렇게 하여 그는 영적인 것을 향하여 전진을 계속하며. 자기 자신을 영화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뜻을 세우고 진리의 계율을 지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진리를 찾다가는 오히려 방황만 하게 된다, 라고.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력 그 자체이며,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방황하면서도 진리를 갈구하는 한,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방황 속에 있을 때도 이 힘이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준다. 올바른 길만 걸으란 법이 어디 있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비난 자체에 이미 불신감이 배어 있다. 그것은 진실의 힘을 신뢰하지 않음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기적 관점에서 목표를 정하는 태도를 버리고, 몰아적 태도로 영으로 하여금 방향을 정하게 하는 일이다. 진실된 것이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가는 이기적 인간의 의지가 하는 일이 아니다. 이 진실된 것 자신이 인간 속에서 지도적 위치를 점하고, 그에게 침투하여, 그 인간을 영계의 영원한 법칙의 모상이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그 영원한 법칙을 생활 속에 플려 넣기 위하여 자신을 그 법칙과 하나로 해야 한다.

  인식을 갈구하는 자는 자신의 사고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지도 엄중히 감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오만에 빠지지 않고 겸허한 자세로 진과 미의 세계를 위한 사자가 될 수 있다. 그것으로 그는 영계에 입문할 것이며, 그것으로 더 높이 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 생활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여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을 갈구하는 자가 이상의 법칙들을 지킬 때, 영계와 관계하는 그의 혼 체험은 전혀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는 이미 혼 체험에만 머물지 않는다. 혼 체험은 이미 자신의 생활에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차 세계의 지각내용으로 바뀐다. 그의 혼 속의 감정, 쾌감과 불쾌감, 기쁨과 고통이 인식기관으로 성장한다. 마치 그의 눈과 귀가 그 자신을 위한 생명활동을 하면서 자신을 무로 돌리고 외부의 인상을 자기 속으로 통과시키듯이, 그리고 인식을 추구하는 자는 그것으로 인하여 평정과 확신이라는 영계 입문에 필요한 혼의 태도를 획득한다. 아무리 큰 기쁨도 그의 정신을 빼앗지 못하고, 그가 여태 간과하고 있던 세계의 특성들을 그에게 전해 준다. 어떤 큰 기쁨도 그의 마음을 흐트려 놓을 수 없다. 그런 평정을 통하여 기쁨을 가져다 주는 일의 본질적 특징이 그에게 드러난다. 고통도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우울하게 할 수 없으며,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그에게 말해 줄 것이다. 눈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단지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듯이, 쾌감과 고통은 혼이 올바로 나아 갈 수 있게 인도한다. 이것이야말로 인식하는 자가 이르러야 할 혼의 균형상태이다. 쾌감과 고통이 인식하는 자의 내면 생활 속에서 파도를 일으키지 않으면 않을수록, 초감각적 세계를 위한 눈이 형성된다. 기쁨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기쁨과 고통을 통해 인식을 얻을 수 없다. 기쁨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그것으로부터 자기 감정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인식을 위한 지각기관이 되어 줄 것이다. 인식하는 자의 혼이 기쁨도 슬픔도 모르는 차가운 인간이 되라는 말은 아니다. 기쁨과 고통은 분명 그의 내면에서 살아 있다. 그러나 영계를 탐구할 때 그것이 존재적 변용을 일으킨다. 그렇게 하여 인식의 “눈과 귀”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와 개인적으로 관계하려 하면, 사물도 우리 성격의 일부분에 한해서만 관계한다. 그것은 사물의 무상한 부분이다. 그 무상한 것과 관계를 끊고, 자기 감정이나 “자아”를 영속적인 것 속에 살리고자 하면, 그 무상한 부분은 중개자가 된다. 그리고 이 중개자를 통하여 사물의 영원한 부분이 밝게 드러난다. 인식하는 자는 자기 속의 영원한 것과 사물 속의 영원한 것의 관계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미 말한 다른 수행을 실천하기 전에, 또는 그 수행 동안, 그는 이 영원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돌, 식물, 동물, 인간을 관찰할 때 이 모든 것 속에서 어떤 영원한 것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상한 존재인 돌 속에서, 그리고 인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변해 가는 감각적 현상을 넘어서 지속되어 가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물어야 한다.

  영을 영원으로 향하게 하면 일상의 번잡한 감각이나 거기에 대한 마음의 배려를 없애게 될 것이므로, 살아 있는 현실에서 자기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는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 반대이다. 한 장의 종이 조각도 한 마리 곤충도 그냥 바라보지 않고, 눈을 통하여 영을 그 대상으로 향하게 할 때, 수많은 비밀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일순간의 불꽃, 미묘한 색채, 목소리의 억양 같은 것을 생생하게 느낄 것이다.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오로지 새로운 생활이 옛 생활에 더해질 따름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소하고 진부한 것일지라도 눈길을 던지는 그 행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퇴색된 사상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며, 영시 능력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방향에서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이 방향으로 얼마나 멀리까지 걸어 갈 수 있는가는 우리의 능력에 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행하고, 다른 것들은 그냥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처음에는 우리의 감각을 지속적인 것으로 향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 수행을 통하여 영시에 의한 지속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일어 날 것이다. 그 인식이 주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수행을 하는 자는 적절한 시기에 반드시 그것을 얻는다.

  이러한 수행을 계속해 가면 이윽고 눈부신 변화가 일어난다. 어떤 사물에서도 지속적인 것, 영원한 것과의 관계를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로부터 중요한 점과 중요하지 않은 점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는 세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의 감정은 주변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된다. 무상한 것은 이전처럼 그것만으로 마음을 끌 수 없다. 그것은 그에게 영원한 것의 일환으로서, 하나의 비유로서 의미를 가질 따름이다. 모든 사물 속에 활동하는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전에는 무상한 것이 그러했듯이, 지금은 이 영원한 것이 그에게 친화력을 가진다. 이것 때문에 생활에서 소외되는 법은 없다. 그는 단지 모든 사물에 대해 그 진정한 의미에 따라 평가하는 법을 배운다. 무의미한 잠꼬대를 들어도 그는 결코 그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잠꼬대에 매몰되지 않고, 거기에서 한정된 가치를 인식한다. 그는 그것을 올바른 빛 아래서 본다. 구름 위를 걸으며 일상생활을 망각하는 자는 인식을 달성한 자가 아니다. 진정한 인식자는 모든 것에 대해 투철한 통찰과 정확한 감수성을 가지며, 그것으로 사물 하나 하나에 정당한 위치를 설정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의지를 사방으로 휘두르는 예측 불가능한 외적 감각세계의 영향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는 인식을 통하여 사물의 영원한 본질을 보았다. 내면 세계가 변화한 지금, 그는 이 영원의 본질을 지각할 가능성을 늘 자기 속에 가지고 있다. 인식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내적 요구에 따른 행위는 사물의 영원한 본질에 따른 행위이다. 왜냐하면 사물이 내 속에서 그 본질을 이야기하므로. 그러므로 내 속에 살아 있는 영원한 것에 따라 나의 행위에 방향성을 부여하는 나는, 영원한 세계질서의 의미를 실천하고 있다. 나는 이미 사물에 떠밀려 무작정 흘러가는 존재가 아니다. 사물 그 자체에 내재해 있고, 지금은 나 자신의 존재법칙이 되어 있는 그 법칙에 따라 나는 사물에 작용하고 있다.”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행위는 우리가 추구하고 노력해야 할 이상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 목표의 달성이 요원한 일이라 하더라도 인식자는 이 목표로 나아가는 길을 뚜렷이 하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자유의지이다. 자유란 자신의 행위이다. 영원한 것에서 그 동기를 이끌어내는 사람만이 스스로 행위할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은 사물 그 자체에서 벗어난 동기로 행동한다. 이런 사람은 세계질서를 벗어나게 된다. 그러면 세계질서가 그를 압도할 것이다. 즉,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의지가 본래 가지고 있는 과제를 다할 수 없다. 그는 자유로울 수 없다. 개별적 존재의 자의성이 제멋대로의 행동을 부추겨 결국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말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내면생활에 작용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 인식의 길을 한 걸음 전진한 셈이다. 이 수행의 결과로서 초감각적 세계에 대한 지각이 열린다. 그는 초감각적 세계에 대한 진실이 어떠한 것인가를 배운다. 그리고 경험을 통하여, 이 진슬들에 대한 확증을 가지게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이 길을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그에게로 다가온다. 지금 처음으로 그에게 의미를 드러내는 비의(Initiation)가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의 힘”에 의해 그에게 전수된다. 그는 “예지의 제자”가 된다. 이 비의는 거기서 외적 인간관계를 고려하지 않을수록 바르게 파악된다. 인식하는 자는 그때 일어나는 일을 암시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는 새로운 고향을 발견한다. 그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초감각적 세계의 주민이 되었음을 의식한다. 영적 통찰력의 원천이 지금 어떤 고차적 영역에서 그에게로 흘러들어 온다. 인식의 빛은 외부에서 그를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인식의 광원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가 제시하는 수수께끼는 그의 내면에서 새로운 빛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영에 의해 형성된 사물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하는 영 그 자체와 대화를 나눈다. 영적 인식의 순간에는, 개인의 사적 생활은 영원한 것의 비유로서 의식된다. 영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회의가 일어나는 것은 사물이 그로 하여금 내면에 작용하는 영에 대한 거짓 관념을 가지게 할 때뿐이기 때문이다. “예지의 제자”는 영 그 자체와 대화할 수 있으므로, 영에 대해 품었던 거짓 이미지를 모두 벗어 던진다. 영에 대한 거짓 이미지를 미신이라 한다. 비의에 입문한 자는 미신에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이 진정한 영의 모습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개인, 회의, 미신에 의한 모든 편견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이야말로 인식의 좁은 길을 통하여 예지의 문에 들어갈 수 있다는 표시이다. 개인과 보편적 영성과의 이 일체성은 개성을 파멸시키는 “만유령” 속의 개인이 자기를 해소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소멸”은 개인의 진정한 발전이 있을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개인이 영계의 관계를 맺을 때에도 개인은 여전히 개인이다. 개성의 극복이 아니라, 개성의 향상이 문제이다. 개개의 영과 보편적 영의 합일을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여러 가지 원이 하나의 원과 합동이 되고, 그 원 속에 자기를 해소시키는 그런 그림이 아니라, 각각이 나름대로의 색깔을 가진 많은 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다채로운 원환은 서로 겹쳐지는 경우에도, 각 색깔은 전체 속에서 그 특질을 잃지 않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 색깔도 그 독자적인 색채 가치를 잃지 않는다. “좁은 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본서의 속편인 <신비학 개론>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영적 인식의 좁은 길은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생생한 기쁨이나 건강한 생활체험에서 벗어나기를 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오해에 대해서는, 영적 현실을 직접 체험하기에 적합한 혼의 분위기는 생활 전반으로 확대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영적 현실의 탐구자는 자신의 혼을 감각적 현실에서 분리시킬 필요가 있고, 또 그것을 강력하게 수행할 필요가 있지만, 이 현실로부터의 유리는 생활 전반에 걸치는 것이 아니므로 결코 세상을 벗어난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영계를 인식하는 행위는 여기서 말한 인식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행위뿐만 아니라, 편견에 흐려지지 않는 건전한 이해력으로 영학상의 진리를 파악하려는 행위에 있어서도 고도의 도덕적 생활태도를 함양시켜주고, 감각적 존재를 진실에 즉하여 인식하는 것을 가르치며,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태도와 내적 혼의 건전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Posted by Counter-Songwriter 우주연

공간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譯

 

 

 

머리말

 

1

  과학철학의 근본적인 과제들에 전념하며 자신의 전사상을 형성해온 철학자, 스스로 할 수 있는 한 단호히 현대 과학의 능동적 理性主義, 점증적 이성주의의 축을 따라온 철학자는, 만약 그가 詩的 상상력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연구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그의 지식을 잊어버려야 하고 그의 모든 철학적 연구의 습관들을 버려야 한다. 이 경우,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은 중요하지 않으며, 사고의 연결과 축조의 오랜 노력, 주가 가고 달이 가는 오랜 노력은 효과 없는 것이다. 오직 시적 이미지를 읽는 순간에 이미지에 전현, 현전해야 할 따름이다 - 시의 철학이 있다면, 그 철학은 한 주된 시행을 접하여 한 고립된 이미지에 대한 전적인 찬동 가운데, 바로 말하자면 이미지의 새로움에서 오는 法悅 그 자체 가운데,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란 갑작스런 정신 psychisme 의 隆起, 부수적인 심리적 인과관계로는 잘 밝혀지지 않는 정신의 융기이다. 또한 일반적이고 조직된 어떤 것도 시의 철학에 기본이 될 수 없다. 원리라는 관념, <기본>이라는 관념은 여기서는 파괴적인 것일 것이다. 그것은 시 작품의 본질적인 現行性, 본질적인 정신적 새로움을 막아버릴 것이다. 오랫동안 다듬어져온 과학사상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경우에는 그것이 이미 실증된 과학적 생각들의 집적체에 새로운 생각이 통합되기를 요구하는 데 반해 - 설사 그 기존의 생각들의 집적체가 모든 현대 과학의 혁명들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새로운 생각에 의해 깊은 수정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할지라도 -, 시의 철학은 다음과 같이 주장해야 한다 - 시적 행위는 과거를, 적어도 그것이 준비되고 나타나는 과정을 우리들이 따라가 볼 수 있는 그러한 가까운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에 뒤이어 우리가 새로운 시적 이미지와,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잠자고 있는 원형 사이의 관계에 언급해야 할 때에라도, 우리는 그 관계가 엄밀히 말해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도록 할 것이다. 시적 이미지는 충동적인 힘에 예속되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메아리가 아닌 것이다. 사정은 차라리 그 역이다 - 이미지의 번쩍임에 의해 먼 과거가 메아리들로 울리는 것이며, 그리고 그 메아리들이 얼마만큼의 깊이에까지 반향하며 사라져가게 되는지 우리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의 새로움과 그의 약동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자체의 힘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의 직접적인 존재론에 속하는 것이며, 우리가 지금 연구의 노력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존재론에 대해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적 이미지의 존재는 아주 흔한 경우 인과관계와는 반대 방향에서, 민코브스키가 그토록 세밀히 연구한 바 있는 울림이라는 것 가운데서, 올바르게 가늠된다고 생각된다. 이 울림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존재의 소리를 가질 것이다. 시인은 존재의 입구에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이미지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민코브스키의 현상학식으로 그것의 울림을 체험해야 할 것이다.

  시적 이미지가 인과관계를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 나름의 중대성을 가진 선언일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자와 정신분석가가 내세우는 이미지의 원인들은 결코, 새로운 이미지의 정녕 非豫測的인 성격이나, 그리고 또 그것이 그것의 창조과정과는 무관한 타인의 영혼 가운데 불러일으키는 감응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시인은 나에게 그의 이미지의 과거를 알려주지 않으나, 그런데도 그의 이미지는 곧 나의 내부에 뿌리를 박는다. 특이한 이미지의 전달성은 커다란 존재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순간적이며 고립적이면서도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이 교감에 대해서 우리는 뒤에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이미지는 우리들을 선동하지만 - 뒤늦게 -, 그러나 선동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은 아니다. 물론 심리적인 연구에 있어서 시인의 인격을 규명하기 위해 정신분석적인 방법에 주의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시인이 그의 생애에서 겪어야 했던 억압 - 특히 학대 - 을 가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적 행위, 그 느닷없이 떠오르는 이미지, 상상력 속에서 존재가 타오르는 그 불꽃은 그러한 조사를 벗어나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밝혀 보기 위해서는 필경 상상력의 현상학에 이르러야 한다. 상상력의 현상학이라는 말로써 우리가 뜻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시적 이미지가 인간의 마음의, 영혼의, 존재의 직접적인 산물 - 그 현행성에서 파악된 - 로서 의식에 떠오를 때, 이미지의 현상을 연구하는 것.

 

 

2

  아마도 사람들은, 왜 우리가 이전까지의 관점을 바꾸어 이젠 이미지의 현상학적인 결정을 탐구하려고 하는지 물을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상상력에 관한 우리의 앞선 저작들에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여러 직관적인 우주발생론들의 네 원리 - 물질의 4원소에 관한 이미지들을 연구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과학철학자로서의 우리의 습관에 충실하게 우리는 이미지들을 일체의 개인적인 해석의 企圖를 떠나서 고찰하려고 했던 것이다. 과학적인 조심성을 이점으로 가지고 있는 이 방법은 그러나 차츰차츰 내게 상상력의 형이상학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불충분한 것으로 여겨졌다. <조심스러운> 태도라는 것은 그것만으로 이미 이미지의 직접적인 역동성을 따름을 거부하는 게 아니겠는가? 실상 우리는 그 <조심성>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가늠할 수 있기도 했다. 지적인 습관을 버린다는 것은 쉽게 선언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실행할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이성주의자에게는 한 조그만 일상의 드라마, 일종의 사고의 이중화, - 그것의 대상이 단순한 한 이미지라는 부분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커다란 정신적인 울림을 불러오는 사고의 이중화인 것이다. 그러나 이 조그만 지적 드라마, 단순히 한 새로운 이미지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 드라마는 바로 상상력의 현상학이 가지는 전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 어떻게 때로 아주 특이한 한 이미지가 정신 전체의 응축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 한 특이한 시적 이미지의 나타남이라는 그 특이하고도 순간적인 사건이 이번에는 다른 영혼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 어떤 준비과정도 없이 -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가? 그것도 상식의 모든 장벽들을, 변화 없는 안정에 행복스러워하는 모든 분별 있는 생각들을 넘어 서서?

  그리하여 이와 같은 이미지의 通主觀性은 그 본질에 있어서 다만 객관적인 참조의 연구습관만으로써는 이해될 수 없다고 내게는 생각되었다. 오직 현상학 - 즉 개인적인 의식 속에서의 이미지의 시발에 대한 고찰 - 만이 이미지의 주관성을 복원하고 이미지의 통주관성의 크기와 힘과 의미를 가늠하는 데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주관성, 통주관성은 한 번에 아주 결정될 수 없는 것이며, 시적 이미지란 사실 본질적으로 <변용적>(變容的)인 것이다. 그것은 개념처럼 <구성적>인 것이 아니다. 아마도 시적 상상력의 변화작용을 이미지들의 세부적인 변용 가운데 드러낸다는 일은 힘든 - 비록 단조롭기는 할지라도 -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시 독자에게는, 잘못 이해되는 수가 너무나 흔한 현상학이라는 명칭을 지닌 학설을 원용하자고 하는 주장은 경청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 하지만 모든 학설을 떠나서 이 주장은 명확하다 - 시 독자에게 이 주장이 요구하는 것은, 이미지를 하나의 대상으로, 더더구나 하나의 대상의 대치물로는 여기지 말고 그것의 특수한 현실을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증여적(贈與的)인 의식의 행위를 의식의 가장 덧없는 산물인 시적 이미지에 조직적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시적 이미지의 차원에서 주체와 대상의 이원성은,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듯 서로 반사하며 끊임없이 활발하게 역류하고 되역류하는 상관관계로 어울어져 있다. 시인에 의한 시적 이미지의 창조의 이 영역에서는 현상학은, 이렇게 말해 볼 수 있다면, 미시적인 현상학인 것이다. 이 사실로 하여 이 현상학은 엄정히 기본적인 것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순수하나 순간적인 주체성과, 완전한 구성에까지 반드시 이르지는 않는 현실의, 이미지에 의한 이와 같은 결합 가운데, 현상학자는 수많은 경험의 영역을 발견한다. 그는, <중대한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 단순한 관찰이기에 - 언제나 연관적인 사고이게 마련인 과학적인 사고의 경우에 있어서와는 달리 - 살펴지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찰의 덕을 입는다. 이미지는 그의 단순성 가운데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소박한 의식의 재산일 따름이다. 그 표현에 있어서 그것은 젊은 언어이다. 시인은 그의 이미지의 새로움으로 하여 언제나 언어의 원천이 된다. 이미지의 현상학이 어떤 것인가를 아주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이미지란 사상에 앞서는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시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차라리 영혼의 현상학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몽상적인 의식에 관한 문헌자료들을 모아야 할 것이다.

  프랑스어 표현의 현대 철학은 - 더구나 심리학은 - 영혼과 정신이라는 두 말의 이원성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프랑스어 표현의 현대 철학과 심리학은 양자 모두, 독일 철학에서는 그토록 많은, 정신 Geist과 영혼 Seele의 아주 명확한 구별을 전제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나 시의 철학이라면 어휘의 모든 힘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그것은 어떤 말이라도 단순화하지 말아야 하고 어떤 말이라도 경직화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철학에 있어서는 정신과 영혼은 동의어가 아니다. 그 두 말을 동의어로 다룬다면, 그로써 우리는 귀중한 텍스트들을 해독함을 스스로 금하게 될 것이며, 이미지들의 고고학이 제공하는 자료들을 왜곡하게 될 것이다.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의 말이다. 어떤 시 작품들에 있어서는 그것은 지울 수 없는 말이 되어 있다. 그것은 숨결의 말이다. 말의 음성적인 중요성은 그것만으로 시의 현상학자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시적으로 영혼이라는 말은 너무나 큰 신념으로써 발음될 수 있게 때문에, 그것은 한 시 작품 전체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에 대응하는 시적 영역은, 우리의 현상학적 탐구에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정신의 관할에 속하는 결정들, 知覺의 세계의 법칙을 되따르는 결정들이 회화의 실현에는 전제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러한 회화의 영역에 있어서도 영혼의 현상학은 한 작품이 나타내는 최초의 영혼의 참여를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알비에서의 죠르쥬 루오 작품 전람회를 위한 훌륭한 소개의 글에서 르네 위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루오가 어디를 통해 자기 작품에 대한 규정들을 부숴버리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들은 이제 다소 쓰이지 않게된, 영혼이라는 말을 환기해야 하리라.> 그런 다음 르네 위그는, 루오의 작품들을 이해하고 느끼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들에 있어서 <일체의 것이 그 원천과 뜻을 얻는 중심적, 중핵, 원점으로 뛰어 들어가야 하며, 바로 그 때에, 잊혀지고 배척되고 있는 말 - 영혼이라는 말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영혼이야말로 - 루오의 그림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데 - 내적인 빛을, <내적 비전>이 그것을 알아서 번쩍이는 색깔들의 세계, 빛나는 태양의 세계로 번역해내는 그러한 내적인 빛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루오의 그림을 사랑함으로써 이해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정녕 전망의 전도가 요구된다. 그는 외부세계의 빛의 반영이 아닌 내적인 빛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내적 비전이라든가 내적인 빛이라는 표현은 아마, 흔히 너무 쉽사리 주장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말하고 있는 사람은 화가 - 바로 빛을 만들어내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어떤 광원에서 빛이 비쳐 나오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붉은 빛깔의 열정의 내밀한 뜻을 살아[體驗]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의 근원에는, 싸우고 있는 영혼이 있다. 야수파의 예술은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은 그러므로 영혼의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작품은 열정에 타는 영혼을 구원해 주어야 하는 법이다.

  위의 르네 위그의 글은, 영혼의 현상학이라는 말을 함에 의미가 있다는 우리의 생각을 굳혀준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시란 영혼의 참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혼에 연결된 의식은 정신의 현상들에 연결된 의식보다 더 휴식적이고 덜 의도적이다. 시 작품 가운데는, 지식에 이르는 길을 지나가지 않는 힘이 나타난다. 영감과 재능의 변증법은, 그 양자의 극점인 영혼과 정신을 살펴볼 때에 밝혀진다. 우리의 견해로는, 시적 이미지의 현상을 그 다양한 뉘앙스들 가운데 연구하기 위해서는, 특히 시적 이미지의 발전과정을 몽상에서부터 이미지의 실현에 이르기까지 따라가보기 위해서는, 영혼과 정신을 갈라봄이 필수적이다. 특히 우리는 다른 하나의 저서에서 시적인 몽상을 연구하려고 하는데, 그 연구는 바로 영혼의 현상학으로서 이루어질 것이다. 몽상이란 그것만으로는 아주 흔히 꿈과 혼동되는 정신적 차원이다. 그러나 시적인 몽상, 스스로를 즐길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영혼들에게도 시적인 즐거움을 마련해 주는 그러한 몽상인 경우에는, 그것은 이젠 잠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신은 휴식할 수 있으나, 시적인 몽상 속에서의 영혼은 긴장 없이 휴식한 채로 맑게 깨어 활동한다. 완전하고 잘 조직된 한 편의 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정신은 그것을, 실현에 앞서 창작계획 가운데 미리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하나의 시적 이미지의 경우에 있어서는 계획이란 없는 법이며, 하나의 영혼의 움직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시적 이미지 가운데서 영혼은 거기에 현전하는 자신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한 시인이 영혼의 현상학적인 문제를 다음과 같이 더할 수 없이 명료하게 제기했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였다. 피에르 쟝 쥬브는 이렇게 썼던 것이다 - <시란 하나의 형태를 落成하는 영혼이다.> 영혼이 낙성한다. 이 경우 영혼은 근원적인 힘이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설사 그 <형태>가 알려져 있고 인지되어 있는 것이며, <흔해빠진 것>을 가지고 만든 것일지라도, 그것은 내적인 시적 빛이 있기 전에는 단순히 정신의 한 대상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영혼이 찾아와서 그 형태를 낙성하고, 거기에서 살며, 기뻐하는 것이다. 위의 피에르 쟝 쥬브의 말은 그러므로 영혼의 현상학의 명료한 잠언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3

  시에 대한 현상학적인 탐구는 그것이 그토록 멀리 나아가려고, 그토록 깊이 내려가려고 하기에, 방법상의 의무로 하여 감정적인 반향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감정적인 반향으로써 다소간 풍요롭게 - 그 풍요로움이 우리들 자신 속에 있든, 시 작품 속에 있는 간데 - 예술 작품을 향수하는 것이다. 시에 대한 현상학이 감정적인 반향을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현상학적인 두 자매어, 반향 울림의 차이는 뚜렷해져야 한다. 반향은 세계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여러 상이한 측면으로 흩어지는 반면, 울림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반향 속에서 우리들이 시를 듣는다면, 울림 속에서는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시를 말한다. 그때에 시는 우리들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울림은 말하자면 존재의 전환을 이룩한다. 이때에 시인의 존재는 마치 우리들 자신의 존재인 듯이 여겨진다. 그러므로 반향의 다양성은 존재 차원에 있어서의 울림의 통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결 단순히 말하자면, 우리들은 여기서, 열정적인 시 독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한 느낌을 마주하고 있다 - 우리들이 읽고 있는 시 작품이 우리들 전체를 온통 사로잡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에 의한 존재의 把持는 명백한 현상학적인 표징을 지니고 있다. 한 시 작품의 표면적인 풍요로움과 내면적인 깊이는 언제나 자매적인 반향과 울림의 현상이다. 시 작품은 그것의 표면적인 풍요로움으로써 우리들 내면의 심층을 되일깨워주는 듯이 여겨진다. 한 시 작품의 심리적인 작용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현상학적 분석의 두 축을 따라서 정신의 표면적인 풍요로움과 영혼의 깊이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울림이라는 명칭은 파생된 말이지만, 그것은 물론 - 이것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 우리가 지금 그것을 연구하려고 하는 시적 상상력의 분야에서는 단순한 현상학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시적 창조가 독자의 영혼에 있어서까지 어떻게 정녕 깨어나는가를 단 하나의 시적 이미지의 울림으로써 규명하려는 것이다. 그의 새로움으로써 시적 이미지는 전언어활동을 흔들어 시작되게 한다. 시적 이미지는 우리들을 말하는 존재의 원초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울림에 의해 우리들은 일체의 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을 그 즉시 넘어섬으로써, 우리들 내부에 시적인 힘이 소박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울림이 있은 다음에야 우리들은 반향을, 감정적인 반응으로, 우리들 자신의 과거가 회상됨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지는 표면을 흔들기에 앞서 깊은 내면을 건드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독자의 단순한 경험에서 진실이다. 시의 독서가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그 이미지가, 다음 순간 정녕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뿌리를 내린다. 우리들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인데, 그런데도 마치 우리들 자신이 그것을 창조할 수 있었으리라는, 마치 우리들 자신이 그것을 창조해야 했으리라는 인상에 눈뜨게 된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언어의 새로운 존재가 되고, 우리들은 그것이 표현하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표현의 생성인 동시에 우리들의 존재의 생성이기도 하다. 이 경우 표현이 바로 존재를 창조하는 것이다.

  위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지금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존재론의 차원을 정의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반적인 주장으로서, 인간에게 있어서 특별히 인간적인 일체의 것은 로고스[말]라고 생각한다. 언어에 앞서 있는 영역에서라면 우리들은 사유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이 주장이 존재의 깊은 차원을 거부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사람들은 적어도, 우리가 시적 상상력에 대해서 계속해 나가고 있는 유형의 연구에 잘 맞춘 연구가설로서 그것을 우리에게 용인해줘야 한다.

  이리하여 로고스의 사건인 시적 이미지는 우리 개인으로서는, 새롭게 하는 힘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이젠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려 한다. 비평가가 취하는 <객관적>인 태도는 <울림>을 짓눌러 버리며, 원칙상, 원초적인 시적 현상이 시발해야 하는 그 깊은 차원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느낀다. 그런가 하면, 심리학자의 경우에는 그는 반향에만 사로잡혀서 계속 그의 감정만을 묘사하려고 한다, 또 정신분석가로 말하자면, 착잡하게 얽힌 그의 해석들의 실타래를 풀려는 데에 골몰하여 울림을 잃어버리고 만다. 정신분석가는 그의 방법상 숙명적으로 이미지를 지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는 이미지를 심리학자보다 더 깊이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야말로 그것을 이해할 따름이다. 정신분석가에게 있어서는 시적 이미지란 언제나 하나의 외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를 해석함으로써 그는 그것을 시적 로고스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해 버린다. 그러므로 <traduttore, traditore[번역가는 반역자]>라는 말을 이 경우보다 더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

  새로운 시적 이미지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것의 相關主觀的 가치를 느낀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열광을 이번에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 이미지를 다시 말하리라는 것을 안다. 한 영혼에서 다른 영혼으로 전달된다는 사실에서 고찰될 때, 우리들은 시적 이미지가 그것의 원인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벗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심리학처럼 좀스럽게 인과적인 학설들이나 정신분석처럼 심하게 인과적인 학설들이 詩性의 존재론을 규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 시적 이미지란 아무것도 그것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며, 문학에서 말하는 교양이라든가 심리학에서 말하는 지각의 경험은 더더구나 그리하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시적 이미지의 본질적인 새로움은 말하는 존재의 창조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 창조성에 의해 상상적인 의식은 아주 단순하게 그러나 아주 순수하게 하나의 기원이 되게 된다. 상상력의 연구에 있어서 시적 상상력의 현상학이 애써야 할 일은 바로, 여러 다양한 시적 이미지들의 이와 같은 기원적인 가치를 드러내는 일인 것이다.

 

 

4

  이와 같이 우리의 연구를 순수한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그 원초에서 파악된 시적 이미지에 국한시킴으로써, 우리는 여러 이미지들의 모임으로서의 시 작품의 作詩의 문제는 밀쳐 놓으려고 한다. 이 작시에 있어서, 아마도 완전한 현상학이 고찰해야 할 작품 구성의 요인들인 다소간 오래된 문화와 한 시기의 문학적 이상을 결합하는, 심리적으로 복잡한 요소들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범위가 넓은 연구계획은, 우리가 지금 펴 보이려고 하는 단연코 기본적인 현상학적 관찰의 순수성을 해칠지 모른다. 참된 현상학자란 철저히 겸손함을 의무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읽고 있는 이미지의 차원에서 독자를 시인으로 만드는, 독서의 현상학적인 힘에 의존한다는 사실도 이미 그것만으로 일말의 오만을 보이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으로는, 한 작품-전체에 미치는 완전하고도 조직된 창조력을 되찾고 되살[再體驗] 독서의 힘을 우리 개인이 맡는다는 것은 더구나 겸손치 못할 것이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정신분석가들이 그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듯이 한 작가의 작품들 전체를 굽어 볼, 종합적인 현상학에 이른다는 것은 우리는 더더구나 희망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현상학적으로 <울릴> 수 있는 것은 개별적인 이미지들의 차원에서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일말의 오만, 그 작은 오만, 그 단순한 독서의 오만, 독서의 고독 속에서 키워지는 그 오만이야말로 우리가 그것의 단순성을 지킬 때, 부인할 수 없는 현상학적인 표지를 지니는 것이다. 이 경우 현상학자는 문학비평가와 공통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흔히 주목된 바 있지만 문학비평가란 자기가 만들 수 없을 작품에 대해서, 심지어는, 손쉽게 비난하는 것으로 알 수 있지만, 자기가 만들고 싶지 않을 작품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인 것이다. 문학비평가는 필연적으로 엄격한 독자일 수 밖에 없다. 너무나 흔히 쓰임으로 해서 이젠 정치가들의 어휘 속에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로 빛을 잃어버린 어떤 콤플렉스를 마치 장갑의 손가락인 양 쉽사리 뒤집어 보이며 문학비평가, 수사학 교수는 무엇이나 알고 무엇이나 판단함으로써, 즐겨 우월 심플렉스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우리로 말하자면 행복한 독서에 빠져서, 많은 열광을 수반한 조그만 독서의 오만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읽고 또 읽는다. 오만이란 여느 경우에 있어서는 우리의 전 정신을 짓누르는 육중한 감정으로 발전하게 되는 데 반해, 행복스런 이미지에 대한 찬동에서 태어나는 그 일말의 오만은 조심스럽고 은밀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오만은 단순한 독자인 우리 내부에, 우리 자신을 위하여,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제 집에서만 으스대는 오만이다. 우리가 시를 읽으며 시인이 되고 싶은 유혹을 되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독서에 다소 열정적인 독자라면 누구나 독서로써, 작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키우고 또 억누르는 법이다. 읽은 페이지가 너무 아름다울 때에는 겸손이 그 욕망을 억누르지만, 그러나 그 욕망은 다시 태어나게 마련이다. 어쨌든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되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 좋아하는 책이 자기 자신에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쟝 피에르 레샤르가 쓴 훌륭한 저서 <시와 깊이>에는, 특히 보들레르와 베를렌느에 관한 두 논문이 들어 있는데, 보들레르가 돋보인다. 왜냐하면 그 자신의 말로, 바보 보들레르의 작품이 그에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두 논문 사이의 어조의 차이는 크다. 베를렌느는 보들레르와 달리 저자의 전적인 현상학적인 찬동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런 법이다. 공감의 밑바닥에까지 이르게 되는 독서의 경우에는, 그것을 표현하는 말에 있어서마저 우리는 <향수자>라고 표현된다. 요한 파울 리히터는 그의 소설 <거인>에서 주인공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 <그는 위인들에게 대한 찬사를, 마치 그 자신이 그 칭송의 대상이기나 한 듯한 기쁨을 느끼며 읽었다.> 어쨌든 독서의 공감은 찬탄과 붙어다니는 법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다소간 찬탄할 수 있으나, 한 시적 이미지에서 현상학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치솟는 성실한 열정, 작으나마 치솟는 찬탄이 언제나 필요하다. 비평적 성찰은, 약간만 하기만 해도, 정신을 그에 뒤이어 나타나게 함으로써 이 찬탄의 치솟음을 막아버리고, 그로써 상상력의 원초성이 파괴되어 버리고 만다. 관조적인 태도의 피동성을 넘어서는 이와 같은 찬탄 가운데, 마치 독자가 작가의 환영이기라도 한 것처럼 읽는 기쁨은 쓰는 기쁨의 반영인 듯이 여겨진다. 적어도 독자는, 베르그송이 창조의 표징으로 생각했던 그 창조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경우 창조는 문장이라는 가는 줄을 따라, 표현의 순간적인 삶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시적 표현은 생명의 필연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면서도 그러면서도 삶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잘 말함은 잘 삶의 한 요소이다. 시적 이미지는 언어의 떠오름이며, 언제나 의미하는 언어보다 약간 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 작품을 읽으며 그것을 살 때, 우리들은 삶에 이로운, 떠오름의 경험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조그만 범위의 떠오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그 떠오름들은 되풀이되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떠오름의 상태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떠오름의 상태에서는 삶은 그것의 발랄함으로써 지적된다. 실용적인 언어의 통상적인 선을 빠져나오는 그 언어의 도약들은 축소판 생의 도약들인 것이다. 수단으로서의 언어라는 주장을 버리고 실재로서의 언어라는 주장을 선택할 축소 베르그송주의는, 시 가운데 언어의 전적으로 현행적인 삶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수세기에 걸친 한 언어의 발전 가운데 나타나는 말들의 삶에 대한 고찰이 있다면, 시적 이미지는 그 옆에, 수학자의 표현을 빌어서 말해 일종의 그 발전의 미분을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위대한 한 시행은 그것이 속하는 언어의 영혼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잊혀진 이미지들을 다시 일깨워 놓는다. 그리고 동시에 말의 예측불가능성을 認可한다. 말을 예측불가능한 것으로 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자유를 닦는 게 아니겠는가? 시적 상상력은 표현에 대한 검열을 무시해 버리는 데 얼마나 큰 매력을 느끼는가!

  옛날 작시법들은 작시의 허용되는 파격들을 규정해 놓았었다. 그러나 현대시는 자유를 바로 언어의 본체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해 놓았다. 그제서는 시는 하나의 자유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5

  이리하여 고립된 한 시적 이미지의 차원에서도, 단순히 시행에 지나지 않는 표현의 생성 가운데에서도, 현상학적인 울림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의 더할 수 없는 단순성 가운데서 현상학적인 울림은 우리들에게 우리말에 대한 완전한 구사력을 준다. 우리들은 정녕 여기에서 반짝이는 반사적인 의식의 미세한 현상을 마주하고 있다. 시적 이미지란 정녕 한결 작은 책임을 요구하는 정신적인 사건이다. 감각적인 현실의 영역에서 그것에 정당성을 찾아준다는 것과, 시 작품의 작시에 있어서 그것의 위치와 역할을 규명한다는 것은, 그 다음에나 생각해야 할 두 가지 일인 것이다. 시적 상상력에 대한 최초의 현상학적 탐구에 있어서는 고립된 이미지, 그것을 전개시키는 문장, 시적 이미지가 빛나고 있는 시행, 때로는 연 등이, 말하자면 장소분석 topo-analyse 같은 것으로 연구해야 할 언어적 공간을 형성한다. J. B. 퐁탈리스가 미셸 레리스를 우리들에게 <말들의 회랑을 돌아다니는 고독한 답사자>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인 것이다. 퐁탈리스의 이 표현은 독서로 체험된 말들의 단순한 충동이 돌아다니는 그 섬유 같은 언어적 공간을 잘 가리켜 보이고 있다. 개념적인 언어의 원자상 조직은 고정의 이유와, 중심적인 응축의 힘을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시행은 언제나 움직임을 가지며, 이미지는 시행의 선 속에 살며시 끼어들어 상상력을 이끌고 간다. 그것은 마치 상상력이 신겸섬유를 만들어 늘이는 것과도 같다. 퐁탈리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표현의 현상학을 위한 아주 확실한 지표의 하나로서 기억해 둘 만한 말이다 -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 전체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 전체가 하나의 시적 이미지 안에 들어가 있다고 말함도 이젠 역설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에 전적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지의 시적 공간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주 분명히 말해, 시적 이미지는 우리들이 직접 산[體驗] 언어에 의한 가장 단순한 경험의 하나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우리가 제의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을 의식의 기원으로서 고찰한다면, 그것은 정녕 현상학의 소관 영역에 드는 것이다.

  사실 현상학에 관한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면, 우리들은 아마도 시적 현상에서 가장 명료하고도 가장 기본적인 교육자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간행된 한 저서에서 반 덴 베르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시인들과 화가들은 타고난 현상학자들이다.> 그리고, 사물들이 우리들에게 <말하며> 그로써 - 만약 우리들이 그 사물들의 언어에 전적인 가치를 준다면 - 우리들은 그 사물들과 접촉을 가지는 것이라는 것을 주목하면서, 반 덴 베르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 <우리들은 성찰로써는 해결의 희망이 없는 문제들의 해결을 계속해 살고 있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박식한 현상학자인 반 덴 베르그의 이러한 말들로써, 철학자는 말하는 존재에 중심을 둔 연구를 함에 있어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6

  만약 우리가 시적 이미지들의 경우에 있어서 순수한 승화(昇華), 아무것도 승화하지 않는 승화, 열정의 짐을 덜어버리고 욕망의 충동에서 해방된 그러한 승화의 영역을 분리해 낼 수 있다면, 아마 정신분석적 연구에 대해 현상학의 입장이 정확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첨단의 시적 이미지에 승화의 절대 상태를 부여함으로써 우리는 단순한 하나의 뉘앙스에 큰 내기를 거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시는 이와 같은 절대적인 승화의 수많은 증거들을 제공해 주고 있는 듯이 우리에게는 여겨진다. 우리들은 그러한 증거들을 이 책의 여기저기에서 빈번히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증거들이 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에게 주어졌을 때, 그들은 시적 이미지에서 단순한 장난, 덧없는 장난, 전혀 공허한 장난밖에 보지 않는다. 이 경우 바로 이미지는 그들에게는 의미없는 것이다 - 욕정적인 의미, 심리적인 의미, 정신분석적인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이미지들이 바로 “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리에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시가, - 분출하듯 솟아나온 많고 많은 이미지들, 그것들로 하여 창조적인 상상력이 제 자신의 영역에 자리잡는 그 많고 많은 이미지들을 가지고 시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미지의 삶 가운데 우리들이 들어가 있으면서, 그것에 앞서 있는 그것의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현상학자가 보기에는 심리주의의 만성적인 징후이다. 그렇게 하지 말고 반대로 시적 이미지를 그것의 존재 가운데 파악하기로 하자. 언어 위에, 통상적인 언어 위로 떠올라 나타나는 이미지가 시적 의식을 남김없이 삼켜 버리기 때문에, 시적 이미지와 더불어 시적 의식이 너무나 새로운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이젠 과거와 현재의 상관관계를 살펴본다는 것이 유용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의미와 감각과 감정에 있어서의 너무나 엄청난 단절의 예들을 제시할 터이므로, 시적 이미지는 새로운 존재의 지배 밑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을 사람들은 용인해 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존재란 행복한 인간이다.

  말에 있어서 행복하니 따라서 실제에 있어서는 불행한 인간이라고 정신분석가는 곧 반박할 것이다. 정신분석가에게는 승화란 바로 보상이 측면적인 도피이듯이, 수직적인 보상, 위를 향한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곧 정신분석가는 이미지의 존재론적인 연구를 떠나버린다 - 그는 한 인간의 역사를 시시콜콜히 파내어, 그 시인의 내밀한 괴로움들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말하자면 꽃을 두엄거름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현상학자는 그토록 멀리 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미지가 바로 눈 앞에 있으며, 말이, 시인의 말이 그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제공하는 말의 행복 - 시인의 생애의 드라마마저 뛰어넘는 그 말의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 시인의 괴로움들을 살아보아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시에 있어서 승화란, 세속적으로 불행한 영혼의 심리를 굽어보듯이 그 위로 솟아올라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 시는 그것이 어떤 드라마틱한 생애를 그려 보이도록 된 것일지라도, 그것에 고유한 행복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순수한 승화는 방법상 드라마틱한 점이 없지 않은데, 왜냐하면 말할 나위 없이 현상학자는 정신분석이 그토록 오랫동안 연구해 온 고전적인 승화과정의 깊은 심리적인 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삶을 반영하지 않는 이미지들, 삶이 마련하는게 아니라 시인이 창조하는 이미지들을 현상학적으로 찾아가는 것인 것이다. 문제는, 시인이 살지 않았던 것을 사는 것이며 언어의 개방성에 몸을 여는 것인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한 경험을 많이 않은 시 작품들에서 얻게 될 것이다. 예컨대 피에르 장 쥬브의 어떤 시편들. 피에르 쟝 쥬브의 책들보다 더 정신분석적인 사색에서 밑거름을 얻은 작품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시는 때때로 너무나 멀리, 높이 솟구치는 불꽃들로 타오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불꽃들이 시작된 최초의 아궁이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시는 끊임없이 그의 원천을 넘어서며. 기쁨과 슬픔 속에서 더 말리 나아가 작품들을 빚어냄으로써 더 자유롭게 있는 것이다>고 그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또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 <내가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지면 질수록, 시적 탐험은 더욱더 統御(통어 : 거느려서 제어함)되고 우연적인 원인에서 멀어지고 순수한 언어형태로 인도되는 것이다.> 피에르 쟝 쥬브는 정신분석이 밝혀낸 <원인>들을 <우연적인> 원인들로 치부하기를 받아들일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쨌든, <순수한 언어형태>의 영역에서는 정신분석가의 원인들을 가지고 시적 이미지를 그것의 새로움 가운데 예언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기껏해야 자유에 이르는 <우연적인 계기>들이 될 따름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시는 - 지금 우리들이 처해 있는 시적 시대에서는 - 그것에만 고유한 <느닷없는 놀라움>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시적 이미지의 예측불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예측불가능성이야말로 통상적인 심리적 설명안을 뒤엎어 버리는 것이다. 시인 자신 그 점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 <시는 특히 그것의 현현의 놀랄 만한 노력 가운데서는, 어떤 미지의 것에 홀려 본질적으로 생성에 몸을 연 주의깊은 사유에만 대응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뒤에 가서 - <그제서는 시인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시인이란 아는 자, 즉 초월하는 자, 그리고 그가 아는 것을 명명하는 자이다.> 그리고 마침내 - <절대적인 창조가 없다면, 시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시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시는 더 열정에 섞여 있고 더 ‘심리화’되어 있다. 그러나 시의 경우, 드문 것, 예외적인 것이 통상적인 것을 규칙으로 확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을 반박하고 새로운 체제를 세운다. 절대적인 승화의 영역이 없다면 - 그것이 아무리 제한되고 높이 있는 것일지라도, 비롯 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들에게는 다다를 수 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그리고 어쨌든 그들은 순수한 시를 연구하지는 말아야 할 사람들이다) - 우리들은 시의 정확한 극성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단절의 면을 정확히 결정하는 데 있어서 주저함이 없을 수는 없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시를 ‘흐리게 하는’ 혼돈된 열정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 높이에서부터 순수한 승화에 접하게 되는 시의 높이는 아마도 모든 영혼들에게 있어서 같은 수준에 위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정신분석가가 연구하는 승화와 시의 현상학자가 연구하는 승화를 분리해야 함은 방법상의 필연성이다. 정신분석가는 물론 시인들의 인간적인 성품을 연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열정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음으로 해서 그는 시적 이미지들을 그것들의 頂上的인 현실 가운데 연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사실 C.G.융이 이 점을 아주 분명히 말해 둔 바 있다 - 정신분석의 판단습관을 따르다가는 <관심은 예술 작품에서 떨어져 나가, 작품에 앞서 있는 심리적인 원인들의 풀 수 없는 혼돈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시인은 임상의 한 케이스, 성적 병리심리의 확정된 한 번호를 달고 있는 예가 되어 버린다. 이리하여 예술 작품의 정신분석은 그 대상에서 멀어져서, 조금도 예술가에게 특별하지 않고 특히 그의 예술에 중요성이 없는, 일반적인 인간적 영역으로 논의를 옮겨 버렸던 것이다.>

  오직 지금 문제되고 있는 논의를 요약해 보이려는 의도에서만이므로, 독자들은 잠깐 동안 우리에게 논쟁적인 태도를 - 논쟁은 우리의 습관에 거의 없는 것이지만 - 허용해 주기 바란다.

  시선을 너무 높이 치켜든 구두장이에게 어느 로마인이 이렇게 말했었다.

 

Ne sutor ultra crepidam

구두장이여, 신발보다 더 높이는 보지 말게.

 

순수한 승화를 문제삼는 경우에, 시의 고유한 존재를 규명해야 할 경우에 현상학자는 정신분석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하지 않으랴?

 

Ne psuchor ultra uterum

둘 중 어느 하나를 넘어서 정신분석을 하지는 마시오.

 

 

7

  필경, 하나의 예술이 자립적이 될 때에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그리되면 그 출발을 현상학의 입장에서 고찰함이 바람직하다. 원칙상 현상학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움을 마주하는 것이다. 심지어 전문적인 수련의 흔적을 지니게 마련인 회화 같은 예술에 있어서도 위대한 성공들은 그러한 수련과는 관계 없는 것이다. 화가 라피크의 작품들을 연구하면서 쟝 레스퀴르는 바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그의 작품들은 넓은 교양과 공간의 모든 역동적인 표현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들을 우정 적용하고 있거나 그것들로써 창작의 비결을 만들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지식은 동시에 그 지식의 망각에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지식이란 무지가 아니라 앎의 초월이라는 어려운 행위이다. 이러한 대가를 치룸으로써 한 작품은 매 순간, 그것의 창조를 자유의 훈련이 되게 하는, 말하자면 순수한 始作과도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텍스트인데, 왜냐하면 그 내용은 곧바로 詩性의 현상학으로 轉置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에 있어서 비지식은 하나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시인에게 전문적인 수련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부차적인 일에 있어서이다. 이미지의 삶은 전적으로 그것의 번개 같은 치솟음 속에, 이미지가 감수성의 모든 여건들의 초월이라는 그 사실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므로, 작품은 삶 위로 너무나 느닷없는 융기를 일으키는 것이어서 삶이 그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쟝 레스퀴르는 라피크에 대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라피크는 창조행위에 대해서, 그것이 그에게 삶에 못지않게 느닷없는 놀라움을 제공해 주기를 요구한다.> 그제서는 예술은 삶의 倍加가 되며, 우리들의 의식을 자극하여 졸지 않게 하는 놀라움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의 경쟁이 된다. 라피크는 자신 이렇게 쓰고 있다 -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오퇴이으의 경마장에서 말들이 내[川]를 건너뛰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내가 실제로 본 그 경마가 내게 가져다 준 것에 못지않은 - 비록 다른 종류의 것일지라도 - 비예측적인 것을 나의 그 그림이 내게 가져다 주기를 기대한다. 이미 과거에 속하는 광경을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일순도 문제될 수 없다. 재현하는 게 아니라 나로서는 그 광경을 전적으로 되살아야[再體驗], 이번에는 새롭고 회화적인 방식으로 되살아야 하며, 그리함으로써 새로운 충격의 가능성을 나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 그리고 레스퀴르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 <예술가는, 그가 사는 것처럼 창조하지 않는다. 창조하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이리하여 현대 화가는 이젠 이미지를 감각적인 현실의 단순한 대치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프루스트는 엘스티르가 그린 장미들에 대해서, 그 꽃들이 <그 화가가 마치 창의력 있는 원예가인 양 만들어낸 장미의 신종이며 그것으로써 그는 장미과를 더 풍부하게 한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8

  고전적 심리학에서는 시적 이미지를 거의 다루지 않는데, 흔히 그것을 단순한 메타포와 혼동한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이미지라는 말은 심리학자들의 저서에서 크게 혼돈되어 쓰이고 있다 - 이미지를 본다고도 하고, 이미지를 재현한다고도 하고, 이미지를 기억 속에 간직한다고도 한다. 상상력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는 것 이외에는 이미지는 무엇이나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저서 <물질과 기억>에서 이미지의 관념은 아주 큰 외연(外延)을 가지고 쓰이고 있는데, 그렇지만 이미지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산출하는 창조적 상상력은 오직 한 번 언급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의 이 산출은 대단찮은 자유의 활동으로 남아 있는 셈이고, 그 활동은 베르그송 철학이 밝히고 있는 위대한 자유로운 행위들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 짧은 大文에서 베르그송은 <환상의 장난>을 예로 들고 있다. 그제서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은 (정신이 자연과 더불어 취하는, 그 이미지들 수만큼의 자유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 복수의 자유들은 존재를 참여시키지 못하며, 언어를 증가시키지 못하고 언어를 그것의 유용성에 의한 역할에서 빠져나오게 하지 못한다. 그 자유들은 정녕 <장난들>이다. 이 경우 상상력은 또한, 추억을 무지개빛깔로 거의 채색하지도 못한다. 그 詩化된 기억의 영역에 있어서 베르그송은 정녕 프루스트에게 미치지 못한다. 정신이 자연과 더불어 취하는 자유들은 참으로 정신의 본성을 가리켜 보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상상력을 인간 본성의 아주 중요한 힘의 하나로 생각하기로 제의한다. 물론, 상상력이 이미지를 산출하는 능력이라고 말함은 조금도 사태를 진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동의어반복은 적어도 이미지를 기억과 같은 것으로 여김을 막는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상상력은 그것의 생동하는 활동에 있어서 우리들을 과거와 현실에서 동시에 떼어낸다. 그것은 미래로 열려 있는 것이다. 과거가 가르쳐 주는 ‘현실의 기능’ - 이것을 드러내는 것은 고전적 심리학인데 - 에 우리는, 이 또한 긍정적인 ‘비현실의 기능’ -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앞선 저서들에서 밝히려고 노력했지만 - 을 덧붙여야 한다. 비현실의 기능쪽이 온전히 못하면, 창조적인 정신활동은 얽매이게 된다. 상상함이 없이 어찌 예견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시적 상상력의 문제들을 한결 단순히 다룰 때, 인간의 정신활동의 그 두 기능 - 현실의 기능과 비현실의 기능을 협동하게 하지 않고서는 시에서 정신적인 이득을 얻을 수 없다. 현실과 비현실을 한데 짜서 의미와 시의 이중활동으로 언어를 역동화하는 시 작품에 의해, 정녕 하나의 리듬 요법이라고나 할 것이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에 있어서 상상하는 존재의 참여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는 이윽고 動詞 적응하다의 단순한 주어가 아니게끔 된다. 실제적인 조건은 더 이상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없게끔 된다. 시와 더불어 상상력은, 바로 비현실의 기능이 자동성 가운데 잠들어 있는 존재를 매혹하고 불안하게 하러 오는 - 그 존재를 언제나 깨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 두 기능의 접경지대에 자리잡는 것이다. 우리들이 순수한 승화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면, 자동성 가운데서도 가장 교활한 자동성, 언어의 자동성도 더 이상 작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순수한 승화의 이 頂上에서 바라본다면, 재현하는 상상력은 더 이상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요한 파울 리히터는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 <재현하는 상상력은 산출하는 상상력의 散文인 것이다.>

 

 

9

(책 요약이므로 생략)

 

 

 

 

Posted by Counter-Songwriter 우주연